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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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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623회 작성일 19-11-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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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남철현 대건 안드레아 수사입니다. 저는 요즘 무엇을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돈 주고 사먹는 것이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길 가다가 예쁜 옷을 보고, 사 입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놀고 싶으면 좋은데 가서 노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이처럼 하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얘기를 시작한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사두가이'가 다가옵니다. ‘사두가이가 누구냐면, 당시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부유함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당시 로마 식민통치에 동조하던 무리였고, 모세 오경은 믿었으나, 부활은 믿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 예수께서는 사두가이에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두가이처럼, 희망을 잃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제가 몇 년 전에 뇌수막염으로 빈센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뜻하지 않게 거기서 환자들이 얘기한 것을 들었는데, 많은 내용이 오갔지만, 제가 기억하는 문장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절망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큰 병을 가지고 있던 환자들의 진솔한 얘기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의 아픔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잃고, 절망에서 헤맬 때가 더욱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사두가이처럼, 육체의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결국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죽은 자를 뜻합니다.

    반면 오늘 1독서에서 등장하는 일곱 아들과 어머니 얘기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고통이나 육체적인 죽음까지도 견디고 이겨서 희망으로 구원된 자를 보여줍니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이처럼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넘어와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이 세상을 넘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수난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것처럼, 희망과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세의 삶에 연연하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를 따르자면, 2천 년 전의 예수님과 지금 현재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 옛날이야기고, 지금 현재와 무슨 관계가 있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시간에는 두 가지 차원의 시간이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인간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초월하여 넘어서는 영원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이러한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살아계신 분이시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런 불완전함를 지닌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완전한 영원을 동경하게 됩니다. 이런 불완전한 것을 뛰어넘어 영원함으로, 하느님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의미라고 여겨집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삶에서 겪는 고통이 성경 안에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 이후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듯이, 내 삶 또한 그분을 따르는 삶인 신앙생활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서 보여지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역사는, 20191110일 나의 역사이며, 나의 신앙생활의 길잡이 네비게이션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말씀으로 살아가라, 복음 말씀으로 살아가라는 것.... 곧 복음 말씀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위로 받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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