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죽음과 삶,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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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804회 작성일 22-08-29 10:00본문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알리고 그분의 길을 닦았던, 그리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가운데 평생 예수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이가 어떻게 이런 허무맹랑한 죽음에 처할 수 있는가?
헤로데가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즐거움으로 답한 딸에게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손님들 앞에서 호언장담하며 되물릴 수 없는 발언을 하지요.
이에 딸이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청할까요?" 이 물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에게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그렇게 이 세상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삶의 막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들어 올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의 끝은 희망의 시작을 의미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고통이기에 예수님으로 인한 희망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통해 얻는 새로운 생명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할지라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가슴 깊이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작정 믿는 것이 더 어리석은 신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없는 믿음은 그저 맹목적인 믿음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생명을 준다는 것,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여기서 보다 현실적인 상황 안에서 상징적 의미로 죽음과 생명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을 상징합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부정'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부정하는 모든 것은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은 자신의 삶의 범주를 작게 만들어 버립니다.
반대로, 삶은 '긍정'을 상징합니다. 긍정은 살아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 힘으로 모든 것이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하는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조금씩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실은 부정보다는 긍정에 기울여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은 삶으로 극복할 수 뿐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정으로 조정당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거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과 생각, 행위, 표현 등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그분께서 주신 삶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살아있음을 그분께 보여드리는 신앙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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