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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조건없이 베풀 수 있는 바보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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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32회 작성일 23-06-2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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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우리 각자마다 기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기대감은 자신과 더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더 크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이 정도야 해주겠지, 이 정도는 이해해주겠지...'라는 의식이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이 정도'라는 것의 범위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타인이 '이 정도'까지 베푸는데에 있어서, 어떠한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행하였는지를 생각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결과에 마음을 쓰고 그것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까지는 해줬으니까 자연스레 그 이상을 바라게 됩니다. 나눔과 베풂을 받은 이에게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감사의 마음이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이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봅니다. '이 정도'라는 개념이 과연 자신이 다른 이에게 베푸는데 있어서도 적용되는가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많은 고민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 주고 받음에서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드러나겠습니까?

 

그것은 주고 받는 행위 자체에 그 중요성과 의의를 두기보다 주고 받음 사이에서 계산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고 받음, 이 나눔이 양적, 질적인 계산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형식에 불과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한 행위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조건적 베풂에 불과한 것이며, 이 안에는 분명 보상 심리에 대한 기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보상의 여부에 따라,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이들이 아닌 자신을 위한 베풂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풂 안에서는 '이 정도'라는 유혹이 끊임없이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

 

베풂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베풂의 보상은 그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베푸는데에 있어서 우리는 잠시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바보로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계산적 나눔을 초월하셨기에, 바보처럼 다 내어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바라는대로 그렇게 해주고 있습니까? 그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내적인 유혹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는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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