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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3년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 교황 담화 -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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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3회 작성일 23-11-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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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3년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3년 11월 26일)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 12,12 참조)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지난 8월, 세계청년대회를 위하여 전 세계에서 리스본으로 모여든 수많은 여러분 또래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수많은 불확실성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과의 이 위대한 만남이 거행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키웠습니다. 이 희망은 이루어졌고, 저를 비롯하여 참석한 우리 모두의 온갖 기대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우리의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웠나요! 참되고 고유한 변모의 체험이며 빛과 기쁨의 폭발이었습니다!


‘은총의 땅’에서 거행된 폐막 미사를 마치면서 저는 우리의 대륙 간 순례를 위한 다음 무대는 2027년 대한민국 서울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먼저 2025년 젊은이들의 희년을 위하여 로마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참으로 교회의, 또한 언제나 이동하고 있는 인류의 기쁜 희망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여러분과 함께 희망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기쁨과 희망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 슬픔과 고뇌에 관해서, 그리고 고통받는 인류의 슬픔과 고뇌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사목 헌장 1항 참조). 우리는 이 희년을 준비하는 두 해 동안 먼저 바오로 성인의 말씀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 12,12 참조)에 관하여 묵상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주님께 희망을 둔 이는 지칠 줄 모르고 걸어갑니다.’(이사 40,31 참조)에 관하여 깊이 묵상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는 바오로 성인이 극심한 박해 시대에 시련을 겪는 로마 공동체에 준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희망 속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결실이며 그분 부활의 힘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 또는 기량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 그 자체에서,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는 데에서 나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2011년 세계청년대회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어떻게 설명됩니까? 분명 많은 요인이 함께 작용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 믿음에서 오는 확신입니다. 곧, ‘나를 원하신다. 나는 역사적 소명을 지닌다. 나는 받아들여지고 또 사랑받는다.’라는 확신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조건 없는 받아들여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시고 내가 그것을 확신하게 되어야만 ‘내가 존재하는 것이 참 좋구나.’ 하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존재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줍니다”(교황청 부서에게 한 성탄 인사, 2011.12.22.).


어디에 나의 희망이 있는가?


젊음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약동하는 희망과 꿈에 부푼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하느님 피조물의 광채, 벗들과 또 사랑하는 이들과 맺는 관계, 문화 예술과 또 과학 기술과의 조우,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를 위한 노력, 그 밖의 여러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사람 심지어 젊은이들조차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여러분 또래의 많은 이들이 전쟁, 폭력 분쟁, 왕따와 온갖 고난을 경험하며 절망과 공포와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들은 햇빛이 들어올 수 없는 캄캄한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비극적 표지가 바로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높은 자살률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바오로 성인이 말한 기쁨과 희망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내 희망이 있으리오? 나의 희망? 누가 그것을 볼 수 있으리오?”(욥 17,15)라는 욥기의 구절처럼, 그 누구의 감사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선행을 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 곧 절망이 앞설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에 대하여, 특히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생각하여 볼 때, 시편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 또한 주님께 “왜입니까?”라고 여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빚어진 우리는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기쁨과 희망을 자아내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려 봅니다. 매우 세심하고 창의적인 한 젊은 아버지가 가혹한 현실을 일종의 모험이자 놀이로 바꾸려고 애씁니다. 이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수용소의 끔찍함에서 보호하고 아들의 순수함을 지키며 미래를 앗아가려는 인간의 악의를 막아 주어, 아이가 ‘희망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저 허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가장 끔찍한 악의 사례에서조차 희망의 증인이 된 수많은 성인의 삶에서 펼쳐진 그러한 이야기들을 봅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 요세피나 바키타 성녀, 요제프와 위크토리아 울마와 7명의 자녀 복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증언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마음에 희망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을 탁월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 단순하고 꾸밈없이 현세 가치들을 초월하는 가치들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 보입니다”(「현대의 복음 선교」, 21항).


‘막내’ 희망


프랑스 시인 샤를 페기는 희망에 관한 시의 서두에서 향주삼덕(向主三德), 곧 믿음, 희망, 사랑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세 자매라고 노래합니다.


“막내 여동생 희망은 두 언니 사이에서 나아갑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

그러나 막내 희망이 모든 것을 끌어 줍니다.

믿음은 존재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존재하게 될 것을 봅니다.

사랑은 존재하는 것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존재하게 될 것을 사랑합니다.

……

다른 두 자매를 걸어 나가게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두 자매를 이끌어 주는 것이 희망입니다.

모두 함께 걸어가게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두 번째 덕의 신비를 향한 문)


희망의 겸손하고 ‘작은’ 그러나 본질적인 특성을 저 역시 확신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루하루가 어떻겠습니까? 희망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소금입니다.


희망, 밤에 빛나는 빛


그리스도교 전통의 파스카 성삼일에서 성토요일은 희망의 날입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를 잇는 성토요일은 제자들의 절망과 부활 아침의 기쁨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무인지대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희망이 탄생합니다. 성토요일에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심을 침묵 안에서 기념합니다. 우리는 가장 어두운 골짜기로 내려가시어 그 골짜기를 건너시며 빛으로 타오르시는 주님을 표현한 많은 성화에서 이를 묘사한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단순히 연민으로 바라보시거나 멀리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시고, 어둠 속에서 빛나며 그 어둠을 이기는 빛과 같이 저승에 있는 우리의 순간으로 들어오십니다(요한 1,5 참조). 이는 남아프리카 코사어로 쓴 한 편의 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희망이 다할지라도, 나는 이 시로 희망을 다시 살립니다. 나의 희망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주님 안에 나의 희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좋은 결과가 가까이 왔으니, 희망을 굳건히 지키십시오.”


생각해 보면, 이는 “좋은 결과”가 가까이 왔다고 확신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굳건히 머무르신 동정 마리아의 희망이었습니다. 마리아께서 희망의 여인이시며 희망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는 골고타에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당신의 아드님께서 선포하신 부활의 확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과 희망 가득한 기대로 성토요일의 침묵을 채우셨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실 것이며 악으로 끝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안이한 낙관주의도, 속이기 쉬운 이들을 위한 가짜 약도 아닙니다. 이 희망은 사랑과 믿음에 뿌리를 둔 확신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슬픔과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큰 빛이시자 우리 밤길을 밝히시는 빛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빛나는 샛별’(묵시 22,16)이시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33항).


희망을 키우기


희망의 불꽃이 우리 안에 타오르게 된 다음에 일상생활의 걱정과 두려움과 압박으로 그 불꽃이 꺼질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꽃을 희망의 커다란 모닥불로 키우려면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산소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온화한 산들바람은 우리의 희망을 키우고, 우리는 여기에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희망은 기도로 키워집니다. 기도는 희망을 지키고 새롭게 합니다. 또한 희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희망은 자라나 앞으로 나아갑니다”(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2020.5.20.). 기도한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땅에서 보면 태양이 구름으로 가려질 수 있지만, 우리가 구름 너머로 올라가게 되면 그 태양의 빛과 온기가 우리를 감싸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변이 어둡고 음울하게 보일 때에도 태양이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것을 거듭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친구 여러분,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의 구름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며 더 이상 태양을 볼 수 없을 때 기도의 길로 들어가십시오. “아무도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나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2항).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 안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특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짓눌린다고 느낄 때 그러한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시편 62[61],6)


희망은 우리가 날마다 내리는 선택으로 키워집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라는(로마 12,12 참조) 바오로 성인의 초대는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권고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공유하는 것이 언제나 더욱 수월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구체적인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날마다 다른 이들과 희망의 말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친구와 주변 사람 모두의 삶에 희망의 씨를 뿌리도록 하십시오. “희망은 겸손하며 날마다 쌓아야 하는 덕입니다. …… 작은 일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첫 번째 열매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거행한 아침 미사 강론, 2019.10.29.).


희망의 횃불을 밝히기


여러분은 때때로 밤에 친구들과 함께 밖을 나갈 때 스마트폰을 지니고 가며 그것을 손전등으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대규모 콘서트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 여러분이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이러한 현대적인 촛불을 흔듭니다. 이는 인상적인 광경입니다. 밤에 빛은 우리에게 사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하며, 어떠한 아름다움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납니다. 희망의 빛이신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서 빛을 받습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봅니다.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당신과 어떤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하셨던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신앙의 빛 안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가 희망의 빛으로 사물을 볼 때 그 사물들은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라고 당부합니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희망의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도전과 어려움은 늘 존재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가득 찬’ 희망을 지닌다면 도전과 어려움이 마지막 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맞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다른 이들을 위한 작은 희망의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믿음이 구체적이고 현실에 뿌리 박고 형제자매의 필요에 민감해지는 만큼 이러한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높은 산에서 영광스러운 빛 속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본 그분의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그곳에 머물렀다면 자신들에게는 아름다운 체험으로 남았겠지만, 이를 다른 이들과는 나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피하여 도망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놓아주신 시간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총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선사하시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눔으로써만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희망과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타오르는 불꽃을 키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나누십시오. 여러분은 내어줌으로써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우리만을 위한 따뜻한 느낌처럼 지니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이를 위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희망이 없어서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러분의 친구들 곁에 머무십시오. 무관심과 개인주의에 여러분 자신이 감염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의 희망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 흐르고 퍼질 수 있는 운하처럼 열려 있으십시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시고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젊음이십니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항). 저는 거의 5년 전, 젊은이들을 위한 세계주교시노드가 끝난 다음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와, 특별히 젊은이들을 위한 사목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2018년 세계주교시노드 제15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Final Domcument)와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고합니다. 이 잊을 수 없는 세계주교시노드를 온전히 이행하고자 상황을 잘 살피고 희망으로 함께 일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온전히 우리의 삶을 의탁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 여러분, 여러분이 만들어 가는 여정의 모든 단계를 즐기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기도로써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저를 위한 기도를 청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3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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