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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없는 잉태 신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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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366회 작성일 20-04-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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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눈뭉치를 굴려 만들어낸 큰 눈사람

 

지금 굶고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는 열망을 갖기 힘들다. 이런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생존이다.

초기교회가 딱 그랬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초기교회 박해받던 신앙인들의 관심은 생존에 집중되어 있었다. 초기 교회는 살아남는 것, 그래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다 보니 원죄 없는 잉태 신비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5세기 이후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신앙인들은 서서히 이제 의미 있는 것들을 챙겨 나가자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다 7세기에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의미를 기념하는 축일(128)을 제한적이나마 지내기 시작했고, 이 전통이 9세기에 남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북서부 지방과 아일랜드에 소개되었으며, 11세기는 영국에까지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작은 눈뭉치는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계시 안에서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교회가 작은 눈뭉치를 오랜 시간 굴려 만들어낸 큰 눈사람,‘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의미를 살펴보자. 오랜 신학적 논증의 결과인 만큼 어떤 분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가능한 쉽게 정리한 만큼 천천히 한 줄씩 읽다보면 원죄없는 잉태의 의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신비는 모든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원죄는 마리아가 없앤 것이 아니다. 원죄는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구원의 주도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신다.

둘째, 그래서 마리아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무죄한 잉태는 피조물의 책임감 있는 응답 이전에 실행된, 거저 주시는 은총을 의미한다. 원죄 없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은총 덕분에 우리도 세례를 통해 원죄와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 받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1263 참조)

셋째, 원죄 없는 마리아는 악의 세력에 흔들리지 않고 결점 없는 본성을 지닌 완전한 하느님의 모상을 의미한다. 원죄 없는 새로운 하와, 마리아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최종 목적지인 셈이다.

넷째, 성령은 마리아를 지상에 존재한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게 인도하셨듯이 우리 또한 신비로운 방법으로 이끌고 계신다.

다섯째, 원죄 없는 마리아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예형이고 교회의 원형이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티나 주름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신다.(에페 5,27 참조)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원죄 없는 마리아를 통해 드러났다. 교회는 마리아 안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여섯째, 원죄 없으신 잉태 신비는 마지막에 완성될 희망의 앞당김이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사랑의 충만함이 넘치는 곳이며, 잃었다 되찾는 고향 낙원에 대한 향수다.

 

이러한 의미들을 알고 나면, 원죄 없는 잉태 섭리가 인류 구원을 위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바라보면 하느님 찬미합니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나는 완벽한 은총의 상태를 그리워한다. 흠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분 앞에 설 그 날을 그리워한다. 이 희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또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하고 있다. 죄에서의 구원은 전적으로 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리아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은 원죄 없는 잉태라는 선물을 주셨다. 하느님은 선물을 한보따리 들고 계신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팔이 아플 정도로 많은 선물을 들고 계신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 쥐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정작 구원의 빛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늘에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을 몰아내는 빛은 이미 따뜻하게 우리 곁에 와 있다. 예쁜 꽃 화분을 하나 가지고 있다. 오늘 그 화분을 햇볕 잘 드는 창가로 옮겨야겠다.





김광수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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