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꼬리를 무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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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90회 작성일 21-06-02 11:06본문
편집장 신앙칼럼
- 꼬리를 무는 의문
“와드득, 와드득.”
아이스 커피에 들어 있는 얼음 2개를 입볼 불룩 넣고 신경질적으로 이로 부수어 먹었다. 덥다. 노트북을 켰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얼음 몇 개가 더 부서져 나갔다. 나무 연필을 손가락에 끼워 까딱까딱 거리며, 노트북 모니터 톡톡 두들기기만 벌써 30분 째.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연필은 나무로 만들어 졌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생겨라”라고 해서 창조된, 그 첫 번째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나이테는 1년, 2년 시간이 흘러야 생기는 것이 아닌가. 흙으로 창조된 아담은 배꼽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온 이브는 배꼽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아담과 이브가 배꼽이 있었다면 하느님은 배꼽이 있을까 없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왜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싸울까. 인간은 왜 본질적으로 폭력적일까.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은 왜 폭력에 저항할까. 폭력에 대한 저항도, 그 저항이 불편한 이들에게는 왜 폭력적으로 느껴질까. 사랑과 배려가 인간의 본성일까, 폭력과 증오가 인간의 본성일까. 스스로를 반(半) 천사라고 떠벌리는 인간이 왜 스스로가 반(半) 짐승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할까.
인간은 왜 역사가 흐를수록 더 예측불가한 동물이 될까. 1789년 대혁명 이후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 길거리에서 참수한 프랑스의 그 군중이,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던 그 군중이 새롭게 등장한 나폴레옹 ‘황제’에게 열광하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유럽 정복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뭘까. 자유 평등 박애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하느님 도움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느님을 원망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을까. 성지(聖枝) 흔들며 예수를 환영했던 예루살렘 군중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바라빠를 살려라’고 외치며 예수 살해 공범으로 돌변한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이렇게 변덕스럽고 어리석을까. 우리는 왜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 다시 그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을까. 왜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을까.
인간에게 있어서 돈(錢)은 도대체 뭘까. 왜 부자는 천국에 가기 힘들까.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일까, 적게 필요한 사람일까. 교회는 누구 편일까. 낙태와 사후 피임약을 반대하는 가톨릭교회의 성향은 보수일까 진보일까. 그럼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가톨릭교회는 보수일까 진보일까. 재물을 아까운줄 모르고 흥청망청 쓴다는 의미의 ‘물 쓰듯 한다’는 말이 왜 아랍권에선 ‘무섭게 아껴쓴다’는 뜻으로 쓰일까. 왜 그때그때 다를까. 왜 이럴 때 다르고, 저럴 때 다를까.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교회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여기서, 한국교회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찜통이다. 힘들다. 하느님은 왜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허락하실까.
“와드득, 와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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